
경찰 총기사건 8개월 후 평촌마을에서 33년간 진료 20명 넘게 사망한 집터에서 무서움 모르는 채 살아 평촌마을 주민들이 이장으로 추대하고 마을에 정착 20대 강원도 아가씨가 70대 경상도 할머니로 변해 2026년 4월 26일은 의령군 궁류면 4개 마을(평촌, 운계, 압곡, 토곡) 주민 56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부상을 입은 ‘의령 우순경 주민 총기난사 사건’이 44년째 되는 날이다. 1982년 4월 26일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42년이 흐른 2024년 4월 26일, 궁류면 평촌리 궁류공설운동장 인근 8,891㎡ 면적에 ‘의령 4.26추모공원’이 일부 조성됐다. 그리고 이날 의령군 주도로 유족 등 1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탑 제막식과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역사적인 제1회 위령제가 개최됐다. 1년 후 전체 추모공원 공사를 최종 완료하고 준공식과 함께 개최된 지난해 4월 26일 제2회 위령제에는 사건 43년 만에 경찰을 대표해 김성희 경남경찰청장과 경찰들이 참석해 진심 어린 사죄를 하면서 유족들의 한이 반은 풀렸다. 또 현장에는 70대의 한 할머니가 가슴 아픈 역사를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며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총기사건 발생 8개월 후인 1982년 12월부터 2026년 3월까지 44년간 궁류면 평촌마을에 살고 있는 올해로 6년차 경력의 박명애 이장이었다. ◆희생자들과 전생에 무슨 인연이... 20대 때 강원도에서 평촌마을에 공직자로 발령 받아온 박 이장은 44년 기간 안에 총 33년3개월간 평촌보건진료소(이하 진료소)에서 의령군보건소 보건진료원으로 근무(구 마을회관, 구 진료소, 신 진료소)하고 2015년도에 명예롭게 퇴직했다. 이렇게 보면 그냥 평범할 수 있겠지만 44년 중 구 마을회관과 꿈에 혼령(귀신)이 자주 나오는 무서운 집터의 구 진료소에서 35년간 살고 있는 박 이장의 특이하고도 운명적인 인생 스토리를 알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박 이장이 첫 근무한 구 마을회관은 당시 총기사건 사망자들을 모아 놓았던 곳이었고, 구 진료소는 당시 초상집을 찾은 문상객이 많아 20명이 넘게 사망한 무서운 집터에 지어져 진료와 주거를 겸하는 구조였다. 퇴직을 하면 당연히 마을을 떠날 줄 알았다. 그런데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보건진료소운영협의회의 요청에 따라 마을주민(정착)이 되어 구 진료소에서 무서움과 두려움을 누르며 또 살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를 혼령이 못 가게 잡는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상황을 풀이해보면 ▲억울하게 희생된 혼령들이 집터를 지켜주는 고마움에 박 이장을 돌보는 것인지 ▲꿈에 혼령들이 수없이 나와도 버티는 기가 센 것인지 ▲아니면 희생자들과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잘못 말하면 혼령들이 노할 수(?) 있고 또 사회 정서에도 맞지 않는 불편한 내용들은 싣지 않았다는 것을 먼저 밝힌다. 공직자는 근무지에서 근무기간(평균 1~2년)이 끝나면 다른 지역으로 인사 발령(순환)이 나고, 퇴직하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당연히 돌아간다. 그런데 마을주민들이 퇴직 공직자를 주민으로 정착 할 수 있도록 집을 제공해주고 이장으로 추대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박 이장 역시 근무기간이 2년이었지만 마을과 주민들을 위해 공직자로서의 본분과 부여된 의무를 다하고 살아오다 보니 청순하고 풋풋했던 20대의 강원도 아가씨가 어느덧 70대의 경상도 할머니가 된 것이다. 20년 넘게 궁류면 농악단으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박 이장은 그동안 언론들의 취재를 극구 거절해 오다가 올해 3월에 본지와 인터뷰가 성사 됐다. 수십 년간 꿈속에서 혼령을 만나 무서워도 당차게 살아나가는 한 여자의 특이하고도 운명적 인생 스토리가 처음으로 본지를 통해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강원도 아가씨가 의령군 오지 마을로 인터뷰를 위해 기자와 마주한 첫날, 박 이장은 1956년 강원도 춘성군에서 태어나 의령군 궁류면 오지에 오게 된 44년 전부터의 사연이 감회가 어리는 듯 눈가가 촉촉한 모습으로 회고 했다. 박 이장은 “정부가 1980년 12월부터 의료시혜와 의사배치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오지 및 농˓어촌의 의료취약지역에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으로 진료소를 운영하게 됐다. 나는 진료소에 근무할 수 있는 6개월간의 직무교육수료 후 1982년 12월 보건진료원으로 위촉되어 의령군 궁류면 평촌마을에 왔다. 오게 된 동기는 전국적으로 궁류 경찰 주민 총기사건이 신문과 방송 등 각종 언론에 도배가 되고 있으면서 아무 연고도 없는 경남 의령군 궁류면이 귀에 익숙하게 되었고, 교육 중이었던 나는 주위의 거센 만류에도 망설임 없이 이곳을 선택했다. 실습 기간 중 현지 답사와 지역 현황을 파악했으며, 이러한 곳에서 미약하나마 주민들을 위한 보건의료 봉사를 해 낼 수 있겠다는 젊음의 용기와 의지가 강하게 생겼던 것이다. ◆열악했던 생활 환경과 진료 업무 하지만 평촌마을에는 진료소가 없었고, 난방, 수도, 부엌, 변소(화장실)도 없었던 노후 된 마을회관에서 달랑 방 한 칸을 연탄을 땔 수 있도록 개조하여 임시보건진료소 간판을 걸고 진료 업무를 시작했다. 산골 오지인 만큼 지정된 약품과 의료기구 등은 3개월이 넘어 배정 받을 수 있었고, 구 마을회관이 총기사건 사망자들을 모아 두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이기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1980년대 초반의 농촌지역 환경은 비포장도로, 옛날식 주택에 나무로 불 때는 부엌, 재래식 변소(화장실),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등 모든 여건이 너무나도 열악했다. TV(흑백)도 없는 가구가 다수였으며, 교통수단은 본 마을에서 담당 부락까지 2km∼4Km 이상 걸어가야 진료를 할 수 있는 오지 취약지역 이었다. 담배 농사를 짓고 있는 몇 농가는 소득이 좀 있었고, 벼농사가 주된 소득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 이었다. ◆젊은 혈기와 의욕으로 버틴 세월 젊음의 혈기는 넘쳤지만 민심과 정서를 헤아리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의무 근무기간은 2년이었지만 경찰관 총기사건으로 공인은 불신의 대상이었고, 주민들이 필요로 할 때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나날들의 생활이 하루하루 쌓여 신뢰와 공감을 이루어 내기 까지는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쯤에야 정착 되었다고 생각된다. 마을회관에서의 1년 반 근무 때는 진료를 비롯해 주민들의 건강 요구가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자체운영활성화를 위한 보건진료소운영협의회를 정관에 준하여 6개 담당 마을 대표와 임원 위주로 구성해 운영했다. ◆무서운 집터에 진료소 신축 그렇게 1년이 훌쩍 넘자 총기사건으로 20명이 넘게 사망한 무서운 집터에 진료소를 신축하자는 면장님과 주민들의 의견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썩 내키지 않는 자리였지만 동네 중간에 흉가처럼 자리한 이곳을 봉합하여 밝은 기운이 나올 수 있는 치유의 공간으로 만들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당시 유족들과 주민들은 무서운 초상집 터라서 오래 못 버티고 갈 것으로 믿었으나, 집터에서 혼을 달랜다며 굿을 할 때는 공감하고 동참했다. 1984년도에 신축 중이던 진료소가 준공되어 마을회관에서 이전 했으나 여전히 산수에 의존하는 먹는 물은 매일 부족했고, 시간제 급수에도 때로는 샘터에서 길어다 먹고 빨래와 허드래 물은 하천 물로 근근이 생활했다, 물이 없는 생활에 불편감을 넘어 그만두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몰아치면서 ‘화병‘이 났었다. 그런 심정을 알아주시기라도 하듯, 한 노모께서 지게에 물을 져다 주시면서 ‘가지 말라’고 위로해 주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가슴 뭉클하게 생각난다.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 기억들 총기사건 지역이라는 마을의 특성은 늘 주민들의 아픈 모습을 보고 호소도 들어야 했다. 상급기관의 부족한 지원과 신축 진료소 또한 담장도 없었지만 마을회관 생활에 비하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지붕과 문도 없는 논가의 노상 화장실에 갈 때는 장화를 신었고, 어느 날 밤에는 화장실 앞에 큰 뱀이 주리를 틀고 있어 고함을 지르며 줄행랑을 치는 등 십년감수한 적도 있다. 청소년들이 고성과 반항으로 다툼이 잦았고 흉기에 다쳐 진료소에 왔으며, 진료소 주변을 맴돌면서 젊은 여자를 자주 겁에 질리게 했다, 그때는 아마도 젊음의 혈기를 내뿜으면서 성장 통을 겪는 청소년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담당지역 외 마을 주민들의 긴급한 요청이 들어오면 빠르게 방문해서 응급조치하고 병원에 입원시켰던 일과, 빨간 고추와 쌀 1포대를 지게에 지고 십리 길을 걸어와서 ‘고맙다’며 주고 가신 기억들은 항상 생각해도 감개무량하다. 친정 부모님처럼 쌀, 김치, 참기름 등 먹거리를 갖다 주시던 주민들의 사랑은 수많은 사연과 시간의 흐름 속에 따뜻한 정이 되어 퇴직 때까지 버팀목이 된데 대해 감사드린다. ◆교훈이 된 친정어머니의 손 편지 평촌마을에 1인 근무자로 발령 받고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 적응이 힘들어 하고 있을 때, 한글이 서투른 친정어머니의 손 편지가 미수가루와 함께 소포로 부쳐왔다. 찾아오시는 환자들께 늘 친절하게 애미(엄마) 대하듯 잘 해라. 내가 병원을 가보니 의사가 바빠서인지 물어도 답을 잘 안하고 늙었으니 아픈 것은 당연하다며 서운하게 하더라. 너는 그러지 말라는 내용 이었다. 2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끔 생각 날 때는 그 손 편지를 보며 교훈으로 삼아 진료소 생활을 잘 마무리 한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어리석고 철부지 같은 핑계를 대며 효도는커녕 어머니의 속만 애태우게 했다.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정착하기까지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는 너무 힘들어 더는 못할 것 같은 힘든 시간을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며 산 것 같다, 주어진 농촌의 열악한 환경은 오히려 나에겐 무엇인가를 더 할 수 있게 해주는 구심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주민과의 융합을 기반으로 건강증진을 위한 보건의료사업은 아픈 상처를 가진 이 지역이 오히려 나를 안아주며 이곳에 머물게 한 이유이기도 했다. 의령에서 결혼을 했고, 1988년도에는 진료 편의를 위해 오토바이 면허와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서 마을 곳곳을 방문하며 주민들이 원할 때 마다 교통 불편과 노약자의 삶에 보탬이 되고자 최선을 다했다. 매일 반복되는 진료업무와 건강증진을 위한 각종 예방사업을 병행하며 혼신을 다하다보니 1995년에 국무총리 모범공무원표창을, 2002년 보건의 날에는 경남도지사 표창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0년대를 맞았고, 2009년에는 현재 장소에 진료소가 신축됐다. 모든 것이 업그레이드 된 진료소는 새로운 장비와 주민의 건강증진에 도움이 되는 찜질방과 간단한 마사지기 등도 있었다. 힘들었던 시간과 기억은 새롭게 보강된 건강지킴이 진료소 신축으로 모든 시간 속에 보다 나은 의료 업무를 성숙시켜 펼치게 했으며, 나도 이곳의 주민이 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44년간 보듬어 주시는 주민들에게 감사 33년 3개월간 외길 한 곳에서의 진료소 근무와 퇴직 때까지 주민들의 협조와 배려로 같이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나머지 인생은 나를 품어준 이곳에서 작은 봉사라도 하며 부모와 같은 주민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한다. 1984년도에 지었던 구 진료소 건물을 주민들이 공매해서 저에게 인수하게 해주시어 진짜 정착민이 되게 했다. 또 마을이장으로 추천해 주시어 올해로 6년차 경력의 이장으로 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살고 있어 이 또한 너무 감사한 일이다.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주민들과 44년째 무탈하게 살아 온 날들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멍해진다. 앞으로도 마을공동체 활동에 최선을 다하면서 남은 노후의 길을 묵묵히 가고 싶다.“며 틈틈이 진행된 인터뷰를 마쳤다. 마무리하면 공직자로서 국가정책에 충실히 기여했으며, 생면부지의 주민들을 위해 후회 없이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 가슴 짠한 감동을 받았다. 또 한편으로는 왜소한 여자의 몸으로 여전히 무서운 집터에서 살고 있는 것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변경출 기자 sisa9898@naver.com 사진...2002년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김혁규 경남도지사로부터 도지사 표창을 받는 박명애 진료원(왼쪽) 모습